[열린광장] 고 김윤경 선생을 추모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친구의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김윤경은 경기중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거쳐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문적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평생을 철학, 신학, 역사 연구에 바쳤습니다. 그가 고민한 것은 ‘진정한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와 ‘남북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였습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986년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강연에 참석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비판에 대한 강의는 무려 여섯 시간 동안 이어졌고, 깊이 있는 해석과 논증이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그의 설명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원죄 개념에 대한 상반된 시각을 설명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자식의 입이 쓰겠느냐? 내가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묻지 않겠다’는 성경 말씀을 전하며 “원죄를 지닌 인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깊은 사색을 유도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능력만큼 일하고 번 만큼 소비하는 체제’라면, 공산주의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체제’라는 비교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철학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1년간 강의했습니다. 칸트의 묘비명인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 마음의 도덕법칙’을 되새기며 철학 공부를 다시 이어갔습니다. 특히 정신과 의사들에게도 의미 있는 자료를 찾아 제공할 정도로 연구 범위가 방대했습니다. 그가 건네준 책 중 하나는 철학자이자 신학자, 음악가이면서 목사였던 슈바이처가 37세에 의과대학 졸업 논문으로 발표한 예수에 대한 정신의학적 연구였습니다. 그가 이끈 ‘86역사모임’은 1986년 시작되어 33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강연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역사적 논점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분석하였습니다. 예컨대, 맥아더 장군이 남한을 유엔의 관리하에 둔다고 선언한 반면, 소련은 북한을 독립국가로 인정했다는 문서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소련군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북부를 점령하려 했고, 미국이 이를 막기 위해 두 차례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는 논점도 다루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왜 이렇게 공부만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진정 원하는 바를 하지 않는 인생은 낭비한 것”이라 답했습니다. 이 때문에 화가였던 부인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두 딸은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고등학교 3년을 월반하여 대학에 진학하는 기록을 세웠고, 현재는 인류를 위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윤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이들이 이민 생활 속에서 깊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2월 21일 금요일 밤, 잠든 채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서재에는 중국어로 된 역사서 400여 권, 독일어 원서를 포함한 철학 서적, 그리고 3000여 권의 영어 서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어려운 성장기를 겪었지만 누구와도 다투지 않았고, 평생을 ‘가장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데 바쳤습니다. 그를 떠올리면 “지면을 지그시 누르는 바위의 무게는 날아오르는 새의 중심을 잡아준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의 열정과 애정이 AI 시대에 더욱 산만해져 가는 인간 정신세계 속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로 남기를 바랍니다. 조만철 / 정신과 전문의열린광장 김윤경 선생 김윤경 선생 철학 서적 철학 공부